언론보도

[인터뷰] 빵 공장에서 아이돌봄사까지, 나는 늘 노동자였다

작성자 정보

  • 최고관리자 작성
  • 작성일

컨텐츠 정보

본문

[노말한 사람들] 박미향 공공연대노조 아이돌봄분과 경기지부장


[노말한 사람들]은 ‘노동을 말하는 사람들’이라는 뜻으로, 다양한 직종에서 일하는 민주일반연맹 조합원들이 직접 들려주는 노동 이야기다. 노동자들이 당당한 주체로 살아가기 위해 어떤 선택을 했는지, 투쟁의 이유와 그 과정을 차분히 따라간다. 개인의 문제로만 남겨졌던 숨겨진 이야기들을 공유하며, 지역과 업종, 노조는 달라도 우리가 함께임을 확인하고자 한다. [편집자주]


509484_138217_4130.jpg박미향 공공연대노조 아이돌봄분과 경기지부장. 사진=공공연대노조

나의 20대는 성남의 한 빵 공장에서 노동자로 살아가던 시간이었다. 당시 ‘샤니케익’이라 불리던 그곳에서 야간근무를 하던 어느 날, 화장실에 가다가 목격한 한 장면이 내 인생을 바꿔놓았다. 그날 이후, 내 삶은 ‘어떤 노동자로 어떻게 살 것인가’라는 묵직한 질문으로 가득 차기 시작했다. 빵 공장에서 시작해 학교 급식실, 그리고 지금의 아이돌봄사에 이르기까지 평생을 노동자로, 또 투쟁하는 활동가로 살아온 나의 이야기를 시작하려 한다.

빵 공장에서 시작된 노동운동

새벽녘 몰려오는 잠을 이겨내기 위해 화장실을 가다가 누군가가 기계를 조작하는 것을 보았다. 그는 빵을 만드는 공정 중 밀가루 반죽인 ‘생지’가 내려오는 기계를 다루는 기능공이었다. 그런데 자세히 보니 생지가 더 빨리 내려오도록 조작하는 것이었다.

생지가 빨리 내려오면 빵을 만드는 사람들은 정신없이 그 속도를 따라가야 한다. 그 기능공은 실적을 올리려고 한 것이었을 테지만, 그 모습을 보니 화가 났다. 새벽 2, 3시면 밥 먹을 때를 빼면 앉지도 못한 채로 일하는 노동자들이 졸다시피 하면서 빵을 쌀 때다. 그런데 우리는 누군가 기계를 조작하는 줄도 모르고 “우리 속도가 늦나?”, “내가 너무 졸린 채로 일하는구나” 하며 스스로 자책하며 일하고 있었던 것이다. 너무 억울해서 그 기능공에게 달려갔다.

들어온 지 1년도 채 안 된 20대 노동자가 “왜 기계 작동을 그렇게 빨리 하느냐, 졸면서 빵 싸는 동생 같은 사람들은 보이지 않느냐”고 묻자 돌아온 답변이 딱히 대단할 것도 없었다.

“이게 싸가지 없이 그런 질문을 해?”

이어 그는 빵을 굽는 철판으로 내 머리를 내리쳤고 현장은 아수라장이 되었다. 다음날 출근했더니 그 사건은 모두 내가 잘못한 일이 되어 있었고, 나는 부서 이동을 당했다.

그 사건이 계기가 되어 30년 어용노조 샤니케익 현장에서 대의원 출마 등 노조민주화 투쟁이 시작됐다. 또 대량 해고 사태가 해고 투쟁으로 이어지는 과정 속에서 나는 ‘어떤 노동자로 어떻게 살 것인가’를 고민하고 노동조합 활동을 제대로 하기로 결심했다.

육아와 함께 달라진 운동 방향

공장에서 일을 하며, 노동운동을 하며 지내던 중 결혼을 해 아이 둘을 낳고 주부로 살아가고 있었다. 경제적으로도 힘들었지만, ‘아이로 인해 내 삶이 발목 잡히는 것 같다’는 느낌도 있었다. 그러다가 지역에서 나처럼 노조 활동을 하다가 결혼하고 아이를 낳은 뒤 아무것도 할 수 없게 된 여성들이 모여 여성회를 만들었다.

여성단체에서 활동하면서 아이가 내 발목을 잡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아이로 인해 또 다른 사회 구조를 보게 되는 눈이 생겼다고 느끼게 되었다. 이런 단체 활동은 2010년 민주노동당과의 만남으로 이어졌고, 나는 성남시의원 선거에 출마하기도 했다. 그때 나는 다시 한번 정치에 도전해볼지, 아니면 계속 여성회 활동을 할지 고민했다. 그 무렵 2010년에 교육감 선거가 직선제로 치러지면서 학교 비정규직 문제에 눈뜨게 됐다. 민주노총에서는 비정규직 없는 학교 만들기 사업단이 만들어지면서 학교비정규직 조직사업과 처우개선 투쟁이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바로 학교에 취업했다. 학교 급식실에 취업해 보니 이미 노조는 만들어져 있었지만, 일이 너무 힘들었다. 빵 공장이 정신력으로 버티는 곳이라면, ‘밥 공장’은 말 그대로 육체노동이 전부인 곳이었다. 제시간에 식사를 제공해야 했고, 배식이 끝나면 청소를 빨리 해야 조금이라도 더 앉아 있을 수 있었다. 퇴근할 때에는 거의 기다시피 했다. 그렇게 1년 3개월을 학교 급식실 현장에서 일했다.

학교에 근무하던 당시 노동조합 선거를 통해 지부장이라는 역할도 맡았다. 현장경험이 많은 경력자들이 맡기를 바랐지만 결국 경력도 길지 않은 1년짜리가 지부장이 된 것이다. 그러던 어느 날 학생 수 대비 조리실무사 인원 기준을 세우는 배치 기준표를 이유로 부천지회 조합원 2명이 해고됐다. 급식 인원 대비 일하는 사람이 너무 많다는 이유였다. 그때는 현장에 있었기 때문에 퇴근하고 부천으로 가서 함께 투쟁하고, 새벽에 다시 학교에 가서 졸면서 일을 했다. 그러던 중 이런 생각이 들었다.

‘조합원들이 해고돼서 하루종일 피켓을 들고 부천 시내를 돌고 교육청 앞에서 농성하고 있는데, 지부장이 급식실에서 일하고 퇴근한 뒤에야 가보는 게 맞는 걸까.’

그때 ‘내가 고집하는 그 현장성은 어디에 있는가’를 고민하게 되었고, 노조 전임으로 활동하기로 마음먹었다. 노조에서 주는 공문 하나를 받아 학교에 제출한 뒤 바로 부천지회 조합원들이 농성하고 있는 부천지역교육청으로 달려갔다. 이 일을 시작으로 난 경기지부장과 전국위원장으로 10년 넘게 투쟁했고, 수많은 농성을 하게 되었다. 그리고 재작년 8월 말, 노동조합 임기도 마무리하고 학교에서도 비정규직 노동자로 정년을 맞았다.

‘아이돌봄사’로 다시 만난 노동자의 현실

509484_138218_4726.jpg공공연대노조 돌봄노동자들이 정부서울청 앞에서 기자회견을 열었다. 사진=공공연대노조

정년이 되고 실업급여를 받고 있을 때, ‘아이돌봄’이 눈에 들어왔다. 그래서 교육기관도 알아본 뒤 신청하고 한 달 동안은 정신없이 교육을 받고, 인적성 시험과 면접과 현장실습 등 모든 절차를 거쳤다. 그렇게 아이돌봄사가 되었고, 공공연대노조의 아이돌봄 경기지부장을 맡게 되었다.

아이돌봄사가 처우가 좋을 거라고 예상하고 시작한 것은 아니었으나 현장의 처우는 예상보다 더 열악했다. 우선 교통비. 현실을 전혀 반영하지 않고 지급되는 데다가, 하루에 여러 집을 가도 한 건만 지급한다. 한 집에서 8시간을 일해도 휴게시간이 보장되지 않고, 밥도 도시락을 싸서 다니는데 그것마저 편하게 먹을 수 없다. 일하면서도 ‘이렇게 일하는 건 말이 안 된다’는 생각이 많이 들었다.

과도한 요구를 하는 이용자 가정도 있다. CCTV를 여러 대 설치한 집도 있었고, 홈캠으로 업무를 지시하는 경우도 있었다. 아이와 아이돌봄사를 보호하기 위한 장치는 필요하지만, 지나친 감시까지 정당화될 수는 없다고 생각한다.

심지어 1년마다 재계약을 하고, 부모님이 돌아가시거나 자녀가 결혼해도 개인 연차를 사용해야 했다. 가장 비상식적이라고 느껴진 건 장기근속수당이 없는 것이었다. 사람마다 신체적 차이는 있을 수 있지만 경력을 인정받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일이라고 생각한다. 그런데 해마다 재계약을 하고, 장기근속수당도 없는 것은 정말 비상식적이라고 느꼈다.

최근 조합원들의 의견을 들어보아도 가장 많이 나온 요구는 역시 장기근속수당이었다. 그 다음이 현실적인 교통비와 경조휴가였다. 조합원들이 원하는 것은 그다지 거창한 것이 아니다. 오래 일한 만큼 인정받고, 일하는 데 들어가는 비용을 보전받고, 최소한의 권리를 보장받고 싶다는 것이다.

이런 문제들을 겪으면서 원청교섭의 필요성을 더욱 절실하게 느끼게 됐다. 학교 비정규직 노동자들이 오랜 투쟁 끝에 사용자를 교장에서 교육감으로 바꿔냈듯, 아이돌봄사 역시 실제 권한을 가진 곳과 교섭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이제는 지자체와 성평등가족부가 책임 있게 나서야 할 시기라고 본다. 또한 원청교섭과 조직 확대가 중요한 때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교육이 있는 곳이면 어디든 찾아가 발언하고, 발언할 수 없으면 소식지라도 나눠주고 있다. 조합원이 늘어나야 교섭도 힘을 받을 수 있기 때문이다.

아이돌봄사로 만난 또 다른 노동의 현실

509484_138220_484.jpg공공연대노조 아이돌봄분과 경기지부장에서 '아이돌봄사들에게 지금 당장 필요한 것을?' 스티커 캠페인을 진행하고 있다. 사진=공공연대노조

509484_138219_484.jpg공공연대노조 아이돌봄분과 경기지부장에서 '아이돌봄사들에게 지금 당장 필요한 것을?' 스티커 캠페인을 진행하고 있다. 사진=공공연대노조

3월 노조법 개정은 아이돌봄사들에게도 큰 의미로 다가왔다. 처음에는 실감하지 못했지만 현장의 기대와 반응을 보면서 오랜 투쟁이 만들어낸 변화의 힘을 느낄 수 있었다. 그 힘이 지금 현장 곳곳에서 동력이 되고 있고, 그 한가운데 아이돌봄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올해 아이돌보미가 아이돌봄사로 명칭이 바뀌었지만 이름만 바뀌었을 뿐 처우는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이제는 이름에 걸맞은 노동조건을 만들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실제로 법이 바뀌고 원청교섭이 가능해진 만큼, 우리가 잘 준비하고 돌파해 나간다면 아이돌봄사도 돌봄사답게 일할 수 있을 것이라고 본다.

무엇보다 아이돌봄은 단순한 일자리가 아니다. 저출생과 돌봄 문제를 함께 해결하는, 우리 사회의 필수 노동이다. 실제로 아이돌봄사로 일을 하다 보면 아이들과 정이 들고, 아이돌봄사 조합원들은 만나면 아이들 이야기만 한다. 그만큼 아이돌봄사들의 책임감과 보람이 크기 때문이다.

‘60세 정년’을 맞았을 때는 일을 하다 뚝 끊기는 것 같았다. 하지만 아이돌봄사로 새로운 삶을 시작하면서 우리 사회 곳곳에 노동자들의 삶이 있다는 것을 다시 보게 됐다. 그리고 노조 활동을 하며 그 삶을 조직하는 역할을 이어갈 수 있다는 점이 나에겐 큰 의미가 있다. 그래서 앞으로도 공공연대노조 아이돌봄 경기지부장으로서 역할을 잘 해나가고 싶다.

관련자료

댓글 0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