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동과세계] 대법원 판결까지 받았는데, 나는 왜 일터로 돌아가지 못하나
작성자 정보
- 최고관리자 작성
- 작성일
컨텐츠 정보
- 33 조회
- 목록
본문
[노말한 사람들]은 ‘노동을 말하는 사람들’이라는 뜻으로, 다양한 직종에서 일하는 민주일반연맹 조합원들이 직접 들려주는 노동 이야기다. 노동자들이 당당한 주체로 살아가기 위해 어떤 선택을 했는지, 투쟁의 이유와 그 과정을 차분히 따라간다.
개인의 문제로만 남겨졌던 숨겨진 이야기들을 공유하며, 지역과 업종, 노조는 달라도 우리가 함께임을 확인하고자 한다. [편집자주]
나는 어촌 마을에서 자랐다. 부모님은 어업에 종사하셨고 형도 배를 탔다. 그런 환경 속에서 자라며 나 역시 자연스럽게 바다로 향했다. 주문진수산고와 강원도립대 항해과를 거쳐 선원 자격을 취득했고, 뉴질랜드에서 원양어선을 탔다. 조업의 모든 공정이 배 안에서 이루어지는 ‘트롤선’이었고, 거기에서 사람이 먹을 수 있는 해산물은 거의 다 잡았다. 그렇게 4년을 보내고 나니 육지가 그리워졌고, 그래서 한국으로 돌아가 가정을 꾸려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몇 차례 다른 일을 거친 뒤 2010년 씨스포빌에 입사했다. 당시 회사는 여객선 사업을 막 시작하던 신생 기업이었다.
줄어드는 인원, 무너지는 현장
배에서 은박지를 깔고 식사를 하는 선원들. 사진=민주일반연맹
씨스포빌의 배는 원래 8명을 기준으로 설계됐다. 사고가 났을 때 구명 장비를 제대로 운영하려면 그 정도 인원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국제선 기준도 마찬가지다. 그러나 국내 선원법이 적용되면서 상황은 달라졌다. ‘최저 승무 정원’이라는 기준이 앞세워졌고, 회사는 “법적으로 4명만 있어도 된다”는 논리를 내세웠다. 그 결과 8명이던 인원은 6명으로 줄었고, 결국 5명까지 축소됐다.
계약상 근무시간은 하루 8시간이었다. 하지만 오전 7시에 출항하려면 최소 5시에는 나와 연료를 넣고 각종 준비를 해야 했다. 따라서 출항 전 준비와 입항 후 정리까지 포함하면 하루 15~16시간은 기본이었다. 배는 자동차와 달리 연료와 엔진오일 등 훨씬 많은 양을 다뤄야 한다. 그래서 정비가 필요한 날에는 24시간을 일해도 부족할 정도였다. 심지어 이런 고된 일과를 휴무 한 번 없이 두 달 내내 이어가기도 했다. 그럼에도 회사는 출항 시간부터 도착 시간까지만을 근무로 계산했다.
식대 역시 문제였다. 선원법에는 하루 세 끼 제공이 명시돼 있지만, 내 식대는 월 10만 원에 불과했다. 사실상 하루 한 끼 값으로 한 달을 버티라는 셈이었다. 그래서 배에 밥솥 두 개를 두고 하나에는 밥을, 다른 하나에는 국을 끓여 함께 먹었다. 그렇게 바닥에서 은박지를 깔고, 집에서 가져온 반찬을 동료들과 나눠 먹는 것이 일상이 됐다. 게다가 화장실 역시 모두 승객용이었고 선원 전용은 없었다. 그로 인해 방광염이나 변비를 겪는 동료들도 있었다.
약속 이행 대신 돌아온 해고
법원 앞에서 피켓팅을 하고 있는 모습. 사진=민주일반연맹
2015년부터 2018년까지 회사는 호황을 누렸다. 그러던 중 2019년 말 코로나가 터지면서 임금이 삭감됐다. 선장과 기관장은 20%, 항해사와 기관사는 10% 삭감이었다. 회사는 “정상화되면 소급해주겠다”며 고통 분담을 이야기했다. 그러나 거리두기가 해제된 뒤 우리가 삭감분이라도 돌려달라고 요구하자 돌아온 답은 짧았다.
“없다.”
돈이 없어서 줄 수 없다는 말이었다. 그 한마디로 약속은 사라졌다. 심지어 상황이 더 나빠지면 추가 삭감도 가능하다는 이야기까지 나왔다. 그렇게 30명이던 선원은 14명만 남게 됐다.
남은 이들은 2021년 5월 14일 노조에 가입했고, 그러나 그 직후 나는 다른 배로 발령이 난 뒤 결국 해고됐다. 이미 대체 인력은 준비돼 있었다. 해고 이후 공백이 없이 바로 운항이 되었으니 말이다.
더 아이러니한 점은 새로 채용된 인원에게는 세 끼 식대와 식사 추가 제공, 휴가, 임금 인상이 보장됐다는 사실이다. 해고당한 노동자들이 수차례 요구했던 조건들이 신규 채용된 노동자들에게만 보장됐다.
법정에서도 우리는 지지 않았다. 21번의 쟁송에서 모두 이겼고, 가압류와 근로자 지위 보전도 승소했다. 그럼에도 법원은 회사에 월 330만 원을 지급하라고 판결했지만 아직 한 번도 받지 못했다. 대법원 판결조차 이행되지 않는 현실 속에서 싸움은 길어지고 있다. 제일 큰 문제는 대법원 '복직' 판결도 지키지 않는 사업주, 그리고 그런 상황을 사실상 방치하고 있는 구조다.
반드시 돌아가야 할 이유
선원들은 목숨을 걸고 일하며 성실히 납세했고, 노동자의 의무를 다했다. 그러나 그에 걸맞은 대우는 받지 못하고 있다. 전문 교육을 받은 선원들조차 정당한 노동 조건을 보장받지 못하는 현실이다. 그래서 나는 복직 투쟁과 함께 선원법 개정 운동도 이어가고 있다.
나는 반드시 씨스포빌로 돌아가야 한다. 그래야 동료들과 앞으로 배를 탈 노동자들의 조건을 조금이라도 바꿀 수 있다. 사업주가 약속을 지키지 않고 노동자들을 탄압했기 때문에 오히려 물러설 수 없었다. 그리고 그 싸움을 계속해야 할 또 하나의 이유가 있다.
독도에 간 박성모 선장과 그의 아들, 동료들. 사진=민주일반연맹
2012년 아들이 태어났다. 일만 하다 보니 아이가 언제 처음 걸었는지, 언제 처음 “아빠”라고 했는지도 기억나지 않는다. 어느 순간 아이는 뛰어다니고 있었고, 또 어느새 교복을 입고 있었다. 곁에 오래 있어주지 못했지만, 아이는 나의 1호 지지자가 되었다.
초등학교 2학년 무렵, 내가 운항하던 배를 타고 울릉도와 독도를 함께 간 적이 있다. 태극기를 들고 사진을 찍으며 아이는 아버지의 일을 직접 보았다. 지금은 해고자 신분으로 투쟁 중인 나에게 아이는 말한다.
“아빠가 독도 가는 배 선장이라고 친구들한테 자랑했는데, 거짓말이 되지 않게 꼭 복직해야 해요.”
노동조합 활동, 복직 투쟁, 이런 것을 모른 채 편하게 살 수도 있었겠지만, 그러나 약속을 지키지 않는 현실을 외면할 수는 없었다. 바다가 아닌 땅 위에서 보낸 4년은 길고 지긋지긋했지만 후회는 없다. 다만 이 싸움이 조금이라도 빨리 끝나기를 바랄 뿐이다.
관련자료
-
링크
-
이전
-
다음